[스크랩] 설일(雪日) - 김남조(金南祚)
설일(雪日)
김남조(金南祚)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로써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시어, 시구 풀이]
진종일 : 하루가 다할 때까지
섭리(攝理) : 하느님이 세계를 지배·소유하면서 인간을 구제의 길로 인도하는 질서와 은혜
이적진 : 이적까지는, ‘이적’은 ‘이때’의 사투리
황송한 : 분에 넘쳐 고맙고도 미안한
축연(祝宴) : 축하하는 잔치
승천 : 하늘에 오름, 여기서는 상승의 의미를 지님
혼자는 아니다 -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 1연에 대한 구체적이며 포괄적인 진술이다. 이 세상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를 포함해 그 무엇도 혼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이 항상, 어디서나 함께 해 주기 때문이다. 점층 · 점강법
삶은 언제나 -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 은총을 돌층계로, 섭리를 자갈밭을 비유한 것은 1연에서 바람을 빨래로 표현한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신)의 은총과 섭리를 시각화하였다. 동시에 층계를 오르는 것과 같은 사랑의 힘듦도, 자갈밭을 걷는 것과 같은 삶이 역경도 결국은 신의 은총이며 섭리라는 시적 화자의 깨달음을 표현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로써 삭이고 : 내가 가진 세상의 모든 불평등에 대해 말로써 내뱉으며 타인만을 탓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조용히 내면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시적 화자의 자아 성찰의 자세가 나타난 부분이다. 대구법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 새해를 맞아 좀더 넓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너그럽게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내적 다짐이면서 독자를 향한 제언이기도 하다.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 한 세상을 누리자. : 우리가 가진 생명의 삶은 하늘이 베풀어 준 ‘잔치’이므로 단순히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누리며’ 살겠다는 화자의 긍정적 · 낙천적 삶의 자세가 나타난 부분이다.
새해가 눈시울이 - 백설을 담고 온다. : 눈을 바라보는 화자의 자세가 나타난 부분이다. 화자가 보는 새해의 눈은 단순한 자연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속에 지닌 순수한 마음과 안으로 삭인 슬픔의 눈물이 하늘에 올라 눈이 되어 내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구를 시의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읽어 보면, 시적 자아는 새해라는 삶의 출발점에 서서 사물이든 인간이든 혼자가 아니라 다른 무엇과 함께 존재하며, 나아가 하늘의 은총 및 섭리로 보살핌을 받음으로 외로움에 젖어 삶을 비관할 것이 아니라 너그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다짐을 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 본 흰 눈은 그야말로 순수 그 자체이고, 따라서 그처럼 순수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순수의 얼음꽃’과 ‘승천한 눈물’은 백설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고, 백설은 순수의 상징이다. 의인법. 은유법
[핵심 정리]
지은이 : 김남조(金南祚, 1927- ) 시인. 대구 출생. 카톨릭적 사랑의 세계와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신에 대한 은총과 인간의 사랑 그리고 인간주의적인 밝고 경건한 삶에 대한 예찬 등을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림. 시집으로는 <목숨>, <사랑 초서(草書)>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서정적. 종교적. 성찰적. 상징적
어조 : 차분하면서 설득적이며 기원적인 어조. 건강한 삶을 다짐하는 경건한 어조
심상 : 서술적, 시각적 심상
구성 : 1연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님
2연 하늘만은 함께 있어 줌
3연 삶과 사랑은 은총과 섭리로 이루어짐
4연 너그럽고 황송한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함
5연 기쁨의 눈으로 순수한 백설을 대함
제재 : 새해 눈 내리는 날
주제 : 신의 존재를 느낌으로써 고독을 극복하고, 너그러운 삶을 살아가는 새해의 다짐. 건강하고 순수한 삶에 대한 다짐
출전 : <김남조 시집>(1967), <설일(雪日)>(1971)
▶ 작품 해설
김남조의 시에는 신에 의탁하는 서정적 화자의 자세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두드러진다. 사위가 이울어지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겨울,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겨울 나무 한 그루도 혼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시인의 인식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룬다. 하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시인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태도를 보여 준다. 눈 오는 새해 아침 가지게 되는 건강한 삶에 대한 다짐을 드러내고 있는 이 시를 통해, 개인의 정서와 삶에 대한 자세를 드러내는 방식을 음미해 보도록 하자.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김남조의 시에는 기독교적인 신앙심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의 시에는 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가 뚜렷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 나무를 보면서 혼자 서 있는 듯 보이는 나무도 바람이 있으므로 해서 그 흔들림이 보이고, 보이지 않는 바람도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의해 그 존재가 인식되듯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서 그 누구도 혼자일 수 없다는 데서 이 시는 출발한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하늘은 늘 우리와 함께 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 보이지 않는 하늘, 곧 신의 존재를 ‘은총의 돌층계’, ‘섭리의 자갈밭’ 등으로 시각화시키고 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과 표현을 중심으로 이 시에 나타난 시인의 삶에 대한 자세를 자신의 삶과 비교하면서 감상하고 이해하면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일 것이다.
<참고> ‘설일’의 상징성
이 시에서 ‘순수한 얼음꽃, 승천한 눈물’은 ‘백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눈의 하얀 빛깔이 순수를 상징한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으며, 나아가 그 눈은 본디 물이었고 또 그 물은 땅에서 올라간 수증기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눈물’은 감정의 표현이며, 눈물을 흘릴 때에 사람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진다는 점을 그 앞의 ‘순수’와 연결시킴으로써 ‘승천한 눈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게 된다.